
집 밖에서 북적북적 코너에서는, <청소년 주거권 수다회, 3년의 기록_집 밖에서 집을 찾다>, <청소년 주거권 수다회, 희곡_내 숨이 내 발등에 닿을 때> 책을 읽은 독자들이 남겨준 후기를 연재합니다. 도란도란 모여 청소년들이 수다를 나누었던 말들에 이어, 끄적끄적 기록한 독자들의 후기들이 연결되어 갑니다. 청소년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각자의 마음에 남겨진 것은 무엇인가요? 모두의 주거권으로 연결되는 투쟁의 길을 함께 이어가봅시다! |
그들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
글쓴이 : 조영선
저는 학생인권법과 청소년 인권을 위한 청소년-시민 전국행동에서 활동하면서 고등학교에서 일하는 교사 조영선입니다. 사실 처음에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 ‘온’과 청소년 인권 활동을 함께 하면서도 부끄럽게도 저는 청소년 주거권의 의미를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저에게 학생인권법이 학교에서 그저 머리라도 자유롭게, 옷이라도 편하게 입고, 휴대폰 뺏길 걱정, 맞을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그런 아주아주 기본적인 운동이라고만 생각한반면, 청소년 주거권은 탈가정 청소년들의 뭔가 인생을 책임져야만 하는 그런 거대한 운동처럼 느꼈던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주거권의 문제가 탈가정을 하거나 탈할 가정이 없는 특정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운동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며 저는 물리적으로 집에 살거나, 살지 않거나, 심지어 청소년이거나 아니거나 모든 사람의 삶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집이라는 것이 하룻밤을 머무를 숙소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나라는 존재가 나로서 온전히 있을 수 있는 어떤 공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면, 저 역시 저의 인생을 통틀어 나다운 존재로 살 수 있는 공간을 계속 찾으며 살았을 테니까요.
사실 저는 탈가정한 경험도 없고, 탈가정을 감행해야 할 만큼 양육자로부터 학대를 당하지도 않았지만, 저의 청소년기의 삶의 목적이 있었다면 독립이었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서로 저를 잘 키우겠다는 명목으로 서로를 물어뜯고 싸웠고, 저는 그 속에서 그 목적이 이뤄지면 싸움이 그칠까 하여 제 목숨을 걸어 공부했습니다. 나중에 그것이 제가 책임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제 삶에서 알게 되었을 때 제가 양육자의 눈치를 보며 살았던 저의 청소년기라는 인생이 통째로 도둑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저의 양육자는 이제 80대고, 저는 이제 독립했지만, 저는 그 박탈감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제가 청소년 인권에 대해 오래 관심을 가지고 활동을 할 수 있는 것도 그때 저의 빼앗긴 어떤 시간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에 나온 청소년들이 자기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과 쉼터라는 최소한의 숙소라도 구하기 위해 자기를 죽여야만 하는 마음이 매일 격돌하는 일상을 읽는 것은 저에게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자신을 지키는 건강한 감각은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최소한의 시간과 공간이 주어질 때 가능할 텐데, 그것조차 자신의 일부를 내어줘야 가능한 삶이라면 그 삶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삶과 죽음의 그 어떤 경계에서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살아낸 자’, ‘생존자’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처럼 최소한의 숙소로서 집에서 쫓겨나지 않은 많은 청소년도 ‘너 그렇게 맘대로 하려면 집에서 나가’라는 말을 듣고 삽니다. 실제 청소년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나 때문에 부모가 이러이러한 고생을 하는데 내 맘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집에서 쫓겨나 있든 아니든 대부분의 청소년은 경제적 자립을 하지 못한 대가를 나로서 살아가는 일부를 저당 잡히며 살고 있는 거겠죠. 그렇기에 쉼터에서 청소년들이 하는 질문, 나의 사생활, 침범받지 않는 나만의 세계는 어찌 보면 모든 청소년의 질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들에게 허락된 외출인 학교 역시 이러한 시스템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희 학교도 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벌점으로 매깁니다. 물론 벌점 상쇄 프로그램이 있긴 하지만, 일정 정도 이상이 쌓이면 정학이나 퇴학 등의 징계로 이어집니다. 무엇보다도 그 과정에서 학생들은 이유를 모르는 사소한 규칙도 지키지 않으면 그 공간에 쫓겨난다는 메시지를 계속 받으며 생활합니다. 그러다 이런 생활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학생들은 결국 자퇴를 합니다. 최근 조기에 결정되는 입시 때문에 자퇴가 늘어난다고 사회적으로 걱정을 하지만, 사실 어찌 보면 입시라는 절대 불명의 목적이 없는 학생에게 학교라는 생활이 의미가 없음을 보여주는 방증일 수도 있습니다. 학교 역시 학생들에게 ‘나로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물리적 공간과 시간’을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학교는 누구에겐가 머리 스타일이나 옷차림으로 벌점을 받을 수 있고, 언제든지 내 소지품을 빼앗길 수 있으며 소소한 잘못들이 쌓이면 나가야 하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훨씬 더 예측할 수 없는 위기와 관련된 많은 수고를 하고 계신 쉼터에 계신 선생님들의 고민에서 학교에 있는 저의 고민도 겹쳐보였습니다. 힘이 되고 싶지만, 힘이 될 수 없는 조건들, 결국 나에게 순응적인 학생에게 더 많은 자원을 주고 있는 모습, 나는 학생 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현실의 불의 앞에서 우물쭈물하면서 자퇴하는 학생을 축복하지도, 제대로 도와주지도 못하는 저의 모습이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한계가 있기에 청소년을 보호할 수 있는 어른에게 권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 스스로가 온전히 자신의 삶을 꾸려갈 수 있는 권리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자원이 없고 힘이 없는 사람들이 결국 서로가 서로를 착취하는 관계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이야기 내내 마음을 얼얼하게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보육원에서 그 화와 원망을 서로 싸우고 물어뜯는 것 외에 표출할 방법이 없어 갈비뼈가 부러지도록 맞은 경험을 담담하게 말하고, 내 인생을 내몬 가장 치명적인 가해자가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는 사람이었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몸과 마음을 흔드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큼 ‘살고 싶다’는 생의 의지를 느끼는 장면도 삶과 죽음의 어떤 경계에서 살아내는 존재의 의지를 만나는 경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산다’라는 말을 다시 떠올립니다. 어느 공간에 머무른다는 것이 왜 삶의 전체를 아우르는 ‘산다’의 의미가 되었는지, 주거권이라는 것이 단순히 공간의 획득을 넘어 ‘온전한 나’로서 의 삶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삶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운동의 곁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워졌습니다. 청소년기는 누구에게는 과거였고, 누구에게는 현재이고, 누구에게는 미래이겠지만, 이미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닌 것처럼 대접받는 그 시기가 어찌 보면 한 인간의 삶 전체가 온전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시기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한 ‘삶’을 만드는 주거권 운동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그들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
글쓴이 : 조영선
저는 학생인권법과 청소년 인권을 위한 청소년-시민 전국행동에서 활동하면서 고등학교에서 일하는 교사 조영선입니다. 사실 처음에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 ‘온’과 청소년 인권 활동을 함께 하면서도 부끄럽게도 저는 청소년 주거권의 의미를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저에게 학생인권법이 학교에서 그저 머리라도 자유롭게, 옷이라도 편하게 입고, 휴대폰 뺏길 걱정, 맞을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그런 아주아주 기본적인 운동이라고만 생각한반면, 청소년 주거권은 탈가정 청소년들의 뭔가 인생을 책임져야만 하는 그런 거대한 운동처럼 느꼈던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주거권의 문제가 탈가정을 하거나 탈할 가정이 없는 특정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운동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며 저는 물리적으로 집에 살거나, 살지 않거나, 심지어 청소년이거나 아니거나 모든 사람의 삶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집이라는 것이 하룻밤을 머무를 숙소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나라는 존재가 나로서 온전히 있을 수 있는 어떤 공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면, 저 역시 저의 인생을 통틀어 나다운 존재로 살 수 있는 공간을 계속 찾으며 살았을 테니까요.
사실 저는 탈가정한 경험도 없고, 탈가정을 감행해야 할 만큼 양육자로부터 학대를 당하지도 않았지만, 저의 청소년기의 삶의 목적이 있었다면 독립이었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서로 저를 잘 키우겠다는 명목으로 서로를 물어뜯고 싸웠고, 저는 그 속에서 그 목적이 이뤄지면 싸움이 그칠까 하여 제 목숨을 걸어 공부했습니다. 나중에 그것이 제가 책임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제 삶에서 알게 되었을 때 제가 양육자의 눈치를 보며 살았던 저의 청소년기라는 인생이 통째로 도둑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저의 양육자는 이제 80대고, 저는 이제 독립했지만, 저는 그 박탈감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제가 청소년 인권에 대해 오래 관심을 가지고 활동을 할 수 있는 것도 그때 저의 빼앗긴 어떤 시간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에 나온 청소년들이 자기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과 쉼터라는 최소한의 숙소라도 구하기 위해 자기를 죽여야만 하는 마음이 매일 격돌하는 일상을 읽는 것은 저에게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자신을 지키는 건강한 감각은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최소한의 시간과 공간이 주어질 때 가능할 텐데, 그것조차 자신의 일부를 내어줘야 가능한 삶이라면 그 삶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삶과 죽음의 그 어떤 경계에서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살아낸 자’, ‘생존자’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처럼 최소한의 숙소로서 집에서 쫓겨나지 않은 많은 청소년도 ‘너 그렇게 맘대로 하려면 집에서 나가’라는 말을 듣고 삽니다. 실제 청소년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나 때문에 부모가 이러이러한 고생을 하는데 내 맘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집에서 쫓겨나 있든 아니든 대부분의 청소년은 경제적 자립을 하지 못한 대가를 나로서 살아가는 일부를 저당 잡히며 살고 있는 거겠죠. 그렇기에 쉼터에서 청소년들이 하는 질문, 나의 사생활, 침범받지 않는 나만의 세계는 어찌 보면 모든 청소년의 질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들에게 허락된 외출인 학교 역시 이러한 시스템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희 학교도 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벌점으로 매깁니다. 물론 벌점 상쇄 프로그램이 있긴 하지만, 일정 정도 이상이 쌓이면 정학이나 퇴학 등의 징계로 이어집니다. 무엇보다도 그 과정에서 학생들은 이유를 모르는 사소한 규칙도 지키지 않으면 그 공간에 쫓겨난다는 메시지를 계속 받으며 생활합니다. 그러다 이런 생활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학생들은 결국 자퇴를 합니다. 최근 조기에 결정되는 입시 때문에 자퇴가 늘어난다고 사회적으로 걱정을 하지만, 사실 어찌 보면 입시라는 절대 불명의 목적이 없는 학생에게 학교라는 생활이 의미가 없음을 보여주는 방증일 수도 있습니다. 학교 역시 학생들에게 ‘나로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물리적 공간과 시간’을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학교는 누구에겐가 머리 스타일이나 옷차림으로 벌점을 받을 수 있고, 언제든지 내 소지품을 빼앗길 수 있으며 소소한 잘못들이 쌓이면 나가야 하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훨씬 더 예측할 수 없는 위기와 관련된 많은 수고를 하고 계신 쉼터에 계신 선생님들의 고민에서 학교에 있는 저의 고민도 겹쳐보였습니다. 힘이 되고 싶지만, 힘이 될 수 없는 조건들, 결국 나에게 순응적인 학생에게 더 많은 자원을 주고 있는 모습, 나는 학생 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현실의 불의 앞에서 우물쭈물하면서 자퇴하는 학생을 축복하지도, 제대로 도와주지도 못하는 저의 모습이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한계가 있기에 청소년을 보호할 수 있는 어른에게 권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 스스로가 온전히 자신의 삶을 꾸려갈 수 있는 권리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자원이 없고 힘이 없는 사람들이 결국 서로가 서로를 착취하는 관계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이야기 내내 마음을 얼얼하게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보육원에서 그 화와 원망을 서로 싸우고 물어뜯는 것 외에 표출할 방법이 없어 갈비뼈가 부러지도록 맞은 경험을 담담하게 말하고, 내 인생을 내몬 가장 치명적인 가해자가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는 사람이었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몸과 마음을 흔드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큼 ‘살고 싶다’는 생의 의지를 느끼는 장면도 삶과 죽음의 어떤 경계에서 살아내는 존재의 의지를 만나는 경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산다’라는 말을 다시 떠올립니다. 어느 공간에 머무른다는 것이 왜 삶의 전체를 아우르는 ‘산다’의 의미가 되었는지, 주거권이라는 것이 단순히 공간의 획득을 넘어 ‘온전한 나’로서 의 삶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삶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운동의 곁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워졌습니다. 청소년기는 누구에게는 과거였고, 누구에게는 현재이고, 누구에게는 미래이겠지만, 이미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닌 것처럼 대접받는 그 시기가 어찌 보면 한 인간의 삶 전체가 온전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시기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한 ‘삶’을 만드는 주거권 운동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