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논평] 고인을 추모하며, 탈가정청소년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사회에 책임을 묻는다

지난 8월, 한 수도회에서 탈가정청소년의 추모미사가 진행되었다. 열악한 제도속에서 끝까지 이 청소년에게 지원을 붙여보고자 하는 여러 청소년현장지원기관들이 있었지만 끝내 우리 사회에는 탈가정청소년을 온전히 돌볼 수 있는 지원이 부족했기에, 또 이렇게 한 탈가정청소년을 떠나보내야만 했다. 탈가정청소년에게 이들이 마주하게 되는 다차원적인 불평등한 삶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안전한 집다운 집’과 함께 ‘삶을 위한 지원’ 마련을 촉구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추모한다.
고인은 14세에 가족의 폭력과 방임으로 탈가정한 이후 10대 내내 거리, 지인 집, 쉼터들을 반복하며 삶을 살아내야 했다. 불안정한 주거는 폭력과 위험한 상황으로 너무 쉽게 내몰려지게 만들었고, 그때마다 청소년현장지원기관에서는 탈가정청소년의 곁에서 가능한 지원들을 붙여보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가능한 지원체계보다 위기상황은 언제나 더 크게 다가와서 해결하기에 막막할 뿐이었다.
7년의 시간을 버텨온 고인은 각자도생해서 살아남아야 하는 경쟁사회에서 가장 약하고 취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폭력과 협박의 상황에서 고인은 20세가 되자 엄청난 금융범죄의 피해자가 되어버렸다. 피해사실을 밝히는건 개인의 몫이 되었고, 오히려 피해사실을 입증하지 못하면 죄인이 되는 사회였다. 금융범죄피해로 발생한 법적 문제들은 아이러니하게 지원 자격의 박탈로 이어졌다. 눈덩이처럼 커져만 가는 피해액수와 상황들 속에서 고인의 건강은 오랜 시간에 걸쳐 나빠지고 있었다. 그동안 버티며 살아온 고인의 지난 삶이 어땠을지 감히 상상해본다. 청소년이기 때문에 원가정에서 살 수 없음에도 시설 밖에는 갈 수 없었던 삶, 시설과 거리를 오가며 어디에도 온전히 정착하기 어려웠을 삶. 폭력과 통제에 무감각해지지 않으면 살아내기 어려웠을 삶. 탈가정청소년에게 이런 삶을 살도록 방관하고 내모는 이 사회에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고인의 고단한 삶은 죽어서도 멈춰지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고인의 곁을 지켜왔던 활동가들은 가족이 아니기에 마지막 인사인 장례절차 마음껏 치루어질 수 없었다. 이 긴 시간 외면하며 살아온 직계가족만이 장례를 치루어질 수 있는 권한이 있었으나 어렵게 찾아낸 부모는 시신인수 조차 거부했다. 결국 활동가들은 한참의 시간과 절차를 거쳐 무연고 장례로 청소년과 작별을 할 수 있었다. 가족과 사회로부터 외면 받고 온갖 폭력 속에서 살아내야 했던 외롭고 고통스러웠던 삶은 떠나서도 마찬가지였기에, 마지막까지 애를 써야 하는 현실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탈가정한 청소년의 주거와 삶을 지원하는 시스템은 시설 외엔 아무런 대책이 없다. 주거 이외의 지원 조차 시설을 통해야만 가능했으니 청소년이 시설에서 살기를 원치 않거나 시설에서 지내기 어렵다면 성인이 될 때까지 거리에서 각자 생존하라고 한다. 탈가정청소년은 오랫동안 홈리스 상태로 살아왔는데도 여전히 미성년자여서 주거지원이 어렵다거나 폭력이 여전한 가족에게 돌아가라는 말을 들어야만 한다.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주거 계약이 불가능하거나, 보호자동의 없이는 안전하게 일할 수 없었던 일상을 살게 되는 현실 속에서 이 사회가 말하는 보호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위험한 상황에 놓이는 것을 예방한다는 보호는 청소년을 통제와 배제로 더 위험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어떻게 하면 청소년이 더 안전하고 안심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지원을 기반으로 한 집이 가능할지 방안을 찾기 보다는 법과 규정의 핑계만 대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고인이 버텨온 삶과 죽음으로 우리는 이 사회에 질문한다. 청소년이 홈리스상태를 멈추지 못한 채 성인이 될 때까지 나몰라라 하는 사회, 위험한 일상을 경험하고 있는 이가 겪는 정신적·신체적 피해와 폭력을 청소년 개인의 몫으로 돌리는 사회, 오랜 시간 가족과 관계가 단절된 이에게 가족을 통하지 않으면 지원조차 하지 않겠다는 사회, 과연 이런 죽음을 맞이하는 청소년의 삶과 죽음에 대해 이 사회는 어찌도 이리 무책임할 수 있는가. 어떤 청소년도 거리에서 내몰려 살다가 죽음을 맞이해서는 안된다. 우리 사회는 이런 삶과 죽음에 무책임했던 것을 반성하며 모든 청소년이 ‘안전하고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집’, 그리고 '삶을 함께 돌보는 지원'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떠난 이를 보내는 아픔이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청소년의 삶과 죽음에 무책임했던 국가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기에 우리는 이렇게 계속되는 고통과 죽음 앞에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이러한 죽음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청소년이 이 사회에서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를 보장하라고 요구할 것이며, 그러한 요구가 제도와 정책으로 실현되기를 촉구한다. 이것이 지금 거리에서 살아가는 청소년들에 대한 약속이자 국가가 마땅히 책임져야 할 역할이다.
[추모논평] 고인을 추모하며, 탈가정청소년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사회에 책임을 묻는다
지난 8월, 한 수도회에서 탈가정청소년의 추모미사가 진행되었다. 열악한 제도속에서 끝까지 이 청소년에게 지원을 붙여보고자 하는 여러 청소년현장지원기관들이 있었지만 끝내 우리 사회에는 탈가정청소년을 온전히 돌볼 수 있는 지원이 부족했기에, 또 이렇게 한 탈가정청소년을 떠나보내야만 했다. 탈가정청소년에게 이들이 마주하게 되는 다차원적인 불평등한 삶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안전한 집다운 집’과 함께 ‘삶을 위한 지원’ 마련을 촉구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추모한다.
고인은 14세에 가족의 폭력과 방임으로 탈가정한 이후 10대 내내 거리, 지인 집, 쉼터들을 반복하며 삶을 살아내야 했다. 불안정한 주거는 폭력과 위험한 상황으로 너무 쉽게 내몰려지게 만들었고, 그때마다 청소년현장지원기관에서는 탈가정청소년의 곁에서 가능한 지원들을 붙여보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가능한 지원체계보다 위기상황은 언제나 더 크게 다가와서 해결하기에 막막할 뿐이었다.
7년의 시간을 버텨온 고인은 각자도생해서 살아남아야 하는 경쟁사회에서 가장 약하고 취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폭력과 협박의 상황에서 고인은 20세가 되자 엄청난 금융범죄의 피해자가 되어버렸다. 피해사실을 밝히는건 개인의 몫이 되었고, 오히려 피해사실을 입증하지 못하면 죄인이 되는 사회였다. 금융범죄피해로 발생한 법적 문제들은 아이러니하게 지원 자격의 박탈로 이어졌다. 눈덩이처럼 커져만 가는 피해액수와 상황들 속에서 고인의 건강은 오랜 시간에 걸쳐 나빠지고 있었다. 그동안 버티며 살아온 고인의 지난 삶이 어땠을지 감히 상상해본다. 청소년이기 때문에 원가정에서 살 수 없음에도 시설 밖에는 갈 수 없었던 삶, 시설과 거리를 오가며 어디에도 온전히 정착하기 어려웠을 삶. 폭력과 통제에 무감각해지지 않으면 살아내기 어려웠을 삶. 탈가정청소년에게 이런 삶을 살도록 방관하고 내모는 이 사회에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고인의 고단한 삶은 죽어서도 멈춰지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고인의 곁을 지켜왔던 활동가들은 가족이 아니기에 마지막 인사인 장례절차 마음껏 치루어질 수 없었다. 이 긴 시간 외면하며 살아온 직계가족만이 장례를 치루어질 수 있는 권한이 있었으나 어렵게 찾아낸 부모는 시신인수 조차 거부했다. 결국 활동가들은 한참의 시간과 절차를 거쳐 무연고 장례로 청소년과 작별을 할 수 있었다. 가족과 사회로부터 외면 받고 온갖 폭력 속에서 살아내야 했던 외롭고 고통스러웠던 삶은 떠나서도 마찬가지였기에, 마지막까지 애를 써야 하는 현실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탈가정한 청소년의 주거와 삶을 지원하는 시스템은 시설 외엔 아무런 대책이 없다. 주거 이외의 지원 조차 시설을 통해야만 가능했으니 청소년이 시설에서 살기를 원치 않거나 시설에서 지내기 어렵다면 성인이 될 때까지 거리에서 각자 생존하라고 한다. 탈가정청소년은 오랫동안 홈리스 상태로 살아왔는데도 여전히 미성년자여서 주거지원이 어렵다거나 폭력이 여전한 가족에게 돌아가라는 말을 들어야만 한다.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주거 계약이 불가능하거나, 보호자동의 없이는 안전하게 일할 수 없었던 일상을 살게 되는 현실 속에서 이 사회가 말하는 보호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위험한 상황에 놓이는 것을 예방한다는 보호는 청소년을 통제와 배제로 더 위험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어떻게 하면 청소년이 더 안전하고 안심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지원을 기반으로 한 집이 가능할지 방안을 찾기 보다는 법과 규정의 핑계만 대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고인이 버텨온 삶과 죽음으로 우리는 이 사회에 질문한다. 청소년이 홈리스상태를 멈추지 못한 채 성인이 될 때까지 나몰라라 하는 사회, 위험한 일상을 경험하고 있는 이가 겪는 정신적·신체적 피해와 폭력을 청소년 개인의 몫으로 돌리는 사회, 오랜 시간 가족과 관계가 단절된 이에게 가족을 통하지 않으면 지원조차 하지 않겠다는 사회, 과연 이런 죽음을 맞이하는 청소년의 삶과 죽음에 대해 이 사회는 어찌도 이리 무책임할 수 있는가. 어떤 청소년도 거리에서 내몰려 살다가 죽음을 맞이해서는 안된다. 우리 사회는 이런 삶과 죽음에 무책임했던 것을 반성하며 모든 청소년이 ‘안전하고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집’, 그리고 '삶을 함께 돌보는 지원'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떠난 이를 보내는 아픔이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청소년의 삶과 죽음에 무책임했던 국가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기에 우리는 이렇게 계속되는 고통과 죽음 앞에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이러한 죽음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청소년이 이 사회에서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를 보장하라고 요구할 것이며, 그러한 요구가 제도와 정책으로 실현되기를 촉구한다. 이것이 지금 거리에서 살아가는 청소년들에 대한 약속이자 국가가 마땅히 책임져야 할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