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집 밖에서 북적북적 코너에서는, <청소년 주거권 수다회, 3년의 기록_집 밖에서 집을 찾다>, <청소년 주거권 수다회, 희곡_내 숨이 내 발등에 닿을 때> 책을 읽은 독자들이 남겨준 후기를 연재합니다. 도란도란 모여 청소년들이 수다를 나누었던 말들에 이어, 끄적끄적 기록한 독자들의 후기들이 연결되어 갑니다. 청소년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각자의 마음에 남겨진 것은 무엇인가요? 모두의 주거권으로 연결되는 투쟁의 길을 함께 이어가봅시다! |
탈가정을 통해서 찾아가는 관계로서의 집
글쓴이 : 김순남(가족구성권연구소 공동대표)
새로운 이야기를 통해서 생성되는 연결의 집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이야기들이 출현할 수 있고, 우리 앞에 비로소 들려지는 것은 긴 시간의 운동이고, 저항일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2021년도에 “청소년에게 집다운 집을 내놔라!”라는 청소년 주거권 짓기 인증샷 캠페인이 실시되었다. 그 캠페인에 참여하면서 처음으로 ‘집 다운 집’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공적으로 이야기 해 본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청소년 각자가 자신의 삶에서 집은 어떤 의미인지, 내가 머무는 이곳이 온전히 나로서 존재가 가능한 곳인지 스스로 정의 내릴 수 있고, 사회가 청소년의 목소리를 함께 할 때 청소년 주거권은 시작될 수 있다고 봅니다.”라고 정의했다. 청소년 주거권 운동은 나에게 사는 집(buying)이 아니라, 살아가는 집(living)의 의미를 물었다. 이렇듯, 청소년 주거권 운동은 머물 곳, 소속될 곳을 선택하고,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주체로 보지 않는 ‘금기된 자리’에서 어떻게 함께 이곳에서 정주할 것인가에 대한 움직임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왜 ‘그 가정’은 집이 아니었을까?
이 책에서 이곳이 ‘나의 가정’이 아니라 ‘부모의 집’, 특히 ‘아버지의 집’이라는 것을 가장 실감했던 말은 ‘말 안 들을 거면 이 집에서 나가!”(39쪽)라는 협박이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나가’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들리는 곳은 너의 삶을 통제할 권한이 양육자인 나에게 있고, 경제권이 없는 너는 복종을 해야한다는 소유로서의 집을 여실히 보여준다. 관계로서의 집이 아니라 소유로서의 집은 이 집이 누구의 것인지, 누구의 발언만이 인정되는지, ‘그 가정’ 안에서의 위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집을 나가라는 말이 들리고, 집을 나가게 할까봐 무섭고, 집이라고 자꾸 부르는데 집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 이 집에서 나가는 ‘탈가정’은 두려움과 함께하는 이동이지만, 피할 수 없는 이동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누구나 폭력이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청소년들이 집을 나오는 이유는 다양하다. 성소수자라서, 가정폭력으로 인해서, 통제와 일상적인 훈육으로 인해서, 누군가는 “가족을 평생 미워하며 살고 싶지 않아서, 상처를 주고받기 싫어서”(49쪽) 집을 나왔다고 한다. 어쩌면 이 모든 상황에서 가장 피하고 싶었던 것은 억압적인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지 못해서 결국 그런 자신을 미워하게 되는 그 순간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청소년들이 자신들이 살았던, 지금은 떠나온 ‘그 가정’의 경험을 설명하면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물리적 폭력, 훈육하는 통제, 보호라는 이름의 폭력, 도망치고 쫓겨난 곳, 성소수자로의 삶이 삭제되는 일상, 우울감, 무력감이다. 탈가정은 스스로 자신을 ‘구하고’, 반복되는 ‘그 가정’ 안에서의 폭력의 고리들을 끊어내고자 하는 의지 속에서 가능할 수 있다. 집을 나온 후에 힘들지만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이 먹고 싶을 때 밥을 먹고,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고, 누군가를 초대할 수도 있고, 퀴어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기도 할 수 있는 공간을 갖게 된 것이 주는 이 ‘일상적인 위안’이 이토록 강렬하게 의미화되는 것은 ‘그 가정’ 안에서의 힘겨웠던 삶이 대비되고, 반추되기 때문이다.
탈가정을 문제화하는 것은 성평등하지 않은 사회를 의미한다. 왜 그럴까?
이렇듯, 자신이 소속될 수 있는 집을 찾아가는 것은 탈가정한 청소년만의 의제가 아니라 자신으로 머물 수 있는 삶의 자리가 부재한 모두의 의제일 수밖에 없다. 책을 읽으면서 이혼 연구를 하면서 만났던 한 여성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녀는 사회적으로는 ‘좋은 집’과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던 ‘남편의 집’을 떠나서 이혼 후에 한동안 꽤 가난했지만, 본인이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고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는, 눈치 안 보는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전했다. ‘그 가정’으로 복귀만이 청소년의 삶을 보호하는 길이라고 강조하는 사회는 성평등한 사회와 가장 먼 사회라는 것이 자명하다. 우리는 집을 떠나는 청소년만 문제시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이 이혼을 하고, 결혼한 이주여성들이 집을 나가고, 장애가 있는 사람이 탈가정을 원할 때, 그 모든 것을 문제시하고 범죄화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또한, 가정폭력이 있을 때도 ‘선 가정 후 사회보장’이라는 이름 아래 가정폭력 가해자를 경제적인 책임을 갖는다는 이유로 집으로 돌려보내는 사회에 살고 있다. 탈가정한 청소년을 문제화하고, 어떤 주거와 자립을 위한 구체적인 대책도 마련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가족에게 양육과 돌봄의 책임을 전가하는 사회를 의미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탈가정의 원인을 제대로 양육을 하지 못한 여성의 책임으로 돌리거나, 가난한 가정의 문제로 돌리는 낙인의 연쇄가 작동할 수밖에 없다. 결국, 탈가정한 청소년을 반복적으로 위험을 선택하고, 사회를 혼란케 하는 ‘문제가 있는’ 선택으로만 만드는 것은 가족에게 모든 삶의, 생존의 인프라를 전가하는 가족주의의 위기를 보이지 않게 하는 국가의 통치성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런 사회에서, 청소년만이 ‘집다운’ 집의 부재를 경험하는 게 아니라, ‘그 가정’ 안에서 아이를 적절하게 양육하지 못한 ‘엄마’인 자신을 자책하거나, 경제적으로 제대로 된 가장이 못되었다고 탓하는 젠더화된, 계급화된 고통의 회로 안에 ‘그 가정’이 놓일 가능성이 짙다. 이렇듯, 우리 모두를 ‘그 가정’ 안으로 몰아넣는 사회는 ‘시설화된 집’과 사회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런 지점에서 탈가정과 탈시설은 물리적인 장소의 이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부여하는 고정적인 딸, 아들의 지위, 양육자의 지위, 정상가족의 지위, 집 안과 밖의 공고한 지위를 바꾸어 내는 정치적인 움직임과 교차할 수밖에 없다.
고통의 회로가 아니라 함께 다르게 공존할 수 있는 연결은 가능할까?
어떻게 하면, ‘그 가정’ 너머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이’를 확장하고, 난잡한 연결과 시민적인 연대를 위한 사회의 토대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그것은 이 사회가 그토록 보호라는 이름으로 빼앗은 자유로움, 나다움의 의미를 다시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도 갖고 싶고 보호도 받고 싶었어요. 그런데 집에서는 사생활이 없었어요. 핸드폰도 뺏겼죠. 아빠의 폭력은 일상이 되었어요. 결국 살려고 도망쳤어요” (아깽)
자유와 보호가 둘 다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위험하다고 규정하는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안전하지 않은 모든 상황을 다 통제할 수 없듯이, 위험한 상황 모두를 통제할 수 없다. 어쩌면 가장 위험한 것은 자유로움, 나다움이 삭제된 보호가 가장 안전하다고 믿는 것일 것이다. 위험이 안전과 대비될수록, 위험과 보호가 분리될수록, 안전한 집과 안전하지 않은 바깥 세계는 더 분절적으로 사고 되어 왔고, 그 가정을 지키는 양육자의 권한, 친권의 권한만 강화되는 현실을 용납해 왔다. 그래서, 어쩌면 이 책에서 이야기하듯이 “청소년이 안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의논할 수 있는 관계와 기회의 부재는 청소년을 더 위험한 상황으로” (55쪽) 내몰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집 밖의 외부 세계에 대한 강한 공포나 두려움은 사회적으로 권한이나 결정권이 취약한 존재들에게 지속해서 무력하고, 순응적인 삶을 강제해 왔다. 우리는 집 밖의 외부 세계와 연결되는 환대의 자리 속에서 자신으로 살고,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집 안에서 억압을 경험할 때 숨고, 쉬고, 연결될 수 있는 외부 세계가 존재할 때, 집 안에서도 부당함에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자신을 지킬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주거권, 가족구성권, 탈가정, 탈시설은 스스로 정의할 힘을 만들어 가는 세계
이 책의 서문에서 “청소년 주거권으로 엮이게 된 우리는 모두의 주거권을 찾아가는 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 가정’을 떠난다고 집다운 집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집다운 집은 내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집을 떠나서도 살 수 있는 토대에서만 가능하다. 집다운 집은 사회적으로 가족 밖에서 사회적인 시민적인 연대와 돌봄이 가능할 때만 함께 꿈꾸고 만들 수 있는 장소이다. 집을 떠나서 이동 경로에서 청소년들은 시설로 보내지고, 그곳에서 삼촌으로, 이모로 가족적인 이름으로 불리기를 강요받지만, 그곳은 집일 수 없는 시설화된 사회를 확인하는 공간이다. 내가 부르고자 하는 나의 이름,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이름이 아니라, 여전히 사회가 강요하는 딸, 아들, 어린이, 청소년이어야 하고, 지정 성별을 강요받고, 성적지향을 추궁하는 곳일 때, 어느 곳도 집이 아닌 시설일 수밖에 없다. ‘그 가정’을 떠난 청소년들이 살기 위해서 이동 경로들은 ‘친구 집, 거리, 찜질방, 피씨방, 공중화장실, 사무실, 아르바이트하던 가게’(56쪽)이며, 보호자의 동의 없이 숙박업을 이용할 수 없기에 집 안에 있어도, 집을 나와도 모두가 ‘그 가정’을 대리하는 사회를 마주하게 된다. 임시적으로 머물고, 또 이동해야 하므로 캐리어 하나가 짐의 전부라는 이야기, 주소지를 만들 수 없어서 집 주소가 없는 홈리스 상태로 살아가는 미등록 상태라는 이야기들, 일하기 위해서는 부모님 동의서가 필요한 존재들, ‘자녀는 친권자가 지정한 장소에 거주해야 한다’라는 거소지정권으로 인해서 주거 계약을 할 수 없어서 머물 곳을 찾아야 하는 이동을 강행하지만, 이동의 이유는 너무 분명하다.
‘너무 살고 싶었기 때문’(석민)이라고.
임시적으로 귀속되고, 임시성을 통해서 아슬하게 이어지는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래도 청소년 주거권 이야기는 여전히 어렵게 다가오는 사회에 살고 있다. 잘사는 나라라고 그토록 선전하면서도, 영구임대주택이 3%밖에 안 되는 사회가 한국이며, 많은 이들이 집값에 허덕이면서 생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기존의 한정된 파이를 나누는 것으로 주거권을 상상할 때는, 청소년에게까지 갈 수 있는 주거는 가장 ‘나중에’로 유예될 수밖에 없다. 이토록 주거비와 살 수 있는 집의 부재를 이야기하면서도, 우리는 생존해 온 삶의 방식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나중에’로 유예되는 청소년이 “청소년에게도 집다운 집 내놔라!” 시설 아닌 곳에서 함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주거를 요구한다! 라고 저항하는 이런 목소리들은 지금까지 이 사회가 안정적인 가족이 없으면 모두가 사회적으로 고립, 단절, 불안정성과 연루되었던 사회와의 단절을 통해서 새로운 집과 소속될 자리들을 만들어 가는 움직임이다.
주거권, 가족구성권, 탈가정, 탈시설 움직임은 집다운 집의 의미를, 무엇이 가족인지를, 어떤 삶과 관계를 원하는지를 스스로 정의할 힘을 갖는 것이다. 어떤 삶과 주거와 관계를 원하는지 묻지 않고, 답이 정해져 있는 사회가 아니라, 물음과 질문을 통해서 확장되는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지금 탈가정, 탈시설을 원하고, 다르게 관계를 맺고, 다르게 의존할 권리를 요구하는 가족구성권 운동으로 연결되는 장들이다.
불안하지 않아서 ‘그 가정’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불안함을 안고도 기필코 찾아내고자 하는 그 집은 여러 만남과 돌봄을 통해서 가능하다. 청소년과 활동가의 만남, 청소년들 ‘사이’의 만남, 이 사회와 청소년의 만남, 비청소년과 청소년의 만남, 그 모두의 만남은 언제나 낯설고 새롭게 관계의 문법을 배우고 발명해야하는 책임을 갖는다. 그러한 책임을 함께 갖는 것은 간혹 아주 자주 실패할 수 있고, 종종 힘겨움을 마주하는 시간을 경유할 것이다. 그러나, 마주침의 낯섦을 피하는 자리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억압, 폭력, 단절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마주침의 시간과 연결의 노동과 실패의 의미를 의미화하고, 기록하고, 새기기 위해서 집 밖에서 함께 집을 찾고 서로를 돌보는 활동가들에게 깊은 연대의 감정을 표하고자 한다.
탈가정을 통해서 찾아가는 관계로서의 집
글쓴이 : 김순남(가족구성권연구소 공동대표)
새로운 이야기를 통해서 생성되는 연결의 집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이야기들이 출현할 수 있고, 우리 앞에 비로소 들려지는 것은 긴 시간의 운동이고, 저항일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2021년도에 “청소년에게 집다운 집을 내놔라!”라는 청소년 주거권 짓기 인증샷 캠페인이 실시되었다. 그 캠페인에 참여하면서 처음으로 ‘집 다운 집’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공적으로 이야기 해 본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청소년 각자가 자신의 삶에서 집은 어떤 의미인지, 내가 머무는 이곳이 온전히 나로서 존재가 가능한 곳인지 스스로 정의 내릴 수 있고, 사회가 청소년의 목소리를 함께 할 때 청소년 주거권은 시작될 수 있다고 봅니다.”라고 정의했다. 청소년 주거권 운동은 나에게 사는 집(buying)이 아니라, 살아가는 집(living)의 의미를 물었다. 이렇듯, 청소년 주거권 운동은 머물 곳, 소속될 곳을 선택하고,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주체로 보지 않는 ‘금기된 자리’에서 어떻게 함께 이곳에서 정주할 것인가에 대한 움직임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왜 ‘그 가정’은 집이 아니었을까?
이 책에서 이곳이 ‘나의 가정’이 아니라 ‘부모의 집’, 특히 ‘아버지의 집’이라는 것을 가장 실감했던 말은 ‘말 안 들을 거면 이 집에서 나가!”(39쪽)라는 협박이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나가’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들리는 곳은 너의 삶을 통제할 권한이 양육자인 나에게 있고, 경제권이 없는 너는 복종을 해야한다는 소유로서의 집을 여실히 보여준다. 관계로서의 집이 아니라 소유로서의 집은 이 집이 누구의 것인지, 누구의 발언만이 인정되는지, ‘그 가정’ 안에서의 위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집을 나가라는 말이 들리고, 집을 나가게 할까봐 무섭고, 집이라고 자꾸 부르는데 집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 이 집에서 나가는 ‘탈가정’은 두려움과 함께하는 이동이지만, 피할 수 없는 이동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누구나 폭력이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청소년들이 집을 나오는 이유는 다양하다. 성소수자라서, 가정폭력으로 인해서, 통제와 일상적인 훈육으로 인해서, 누군가는 “가족을 평생 미워하며 살고 싶지 않아서, 상처를 주고받기 싫어서”(49쪽) 집을 나왔다고 한다. 어쩌면 이 모든 상황에서 가장 피하고 싶었던 것은 억압적인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지 못해서 결국 그런 자신을 미워하게 되는 그 순간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청소년들이 자신들이 살았던, 지금은 떠나온 ‘그 가정’의 경험을 설명하면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물리적 폭력, 훈육하는 통제, 보호라는 이름의 폭력, 도망치고 쫓겨난 곳, 성소수자로의 삶이 삭제되는 일상, 우울감, 무력감이다. 탈가정은 스스로 자신을 ‘구하고’, 반복되는 ‘그 가정’ 안에서의 폭력의 고리들을 끊어내고자 하는 의지 속에서 가능할 수 있다. 집을 나온 후에 힘들지만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이 먹고 싶을 때 밥을 먹고,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고, 누군가를 초대할 수도 있고, 퀴어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기도 할 수 있는 공간을 갖게 된 것이 주는 이 ‘일상적인 위안’이 이토록 강렬하게 의미화되는 것은 ‘그 가정’ 안에서의 힘겨웠던 삶이 대비되고, 반추되기 때문이다.
탈가정을 문제화하는 것은 성평등하지 않은 사회를 의미한다. 왜 그럴까?
이렇듯, 자신이 소속될 수 있는 집을 찾아가는 것은 탈가정한 청소년만의 의제가 아니라 자신으로 머물 수 있는 삶의 자리가 부재한 모두의 의제일 수밖에 없다. 책을 읽으면서 이혼 연구를 하면서 만났던 한 여성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녀는 사회적으로는 ‘좋은 집’과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던 ‘남편의 집’을 떠나서 이혼 후에 한동안 꽤 가난했지만, 본인이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고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는, 눈치 안 보는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전했다. ‘그 가정’으로 복귀만이 청소년의 삶을 보호하는 길이라고 강조하는 사회는 성평등한 사회와 가장 먼 사회라는 것이 자명하다. 우리는 집을 떠나는 청소년만 문제시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이 이혼을 하고, 결혼한 이주여성들이 집을 나가고, 장애가 있는 사람이 탈가정을 원할 때, 그 모든 것을 문제시하고 범죄화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또한, 가정폭력이 있을 때도 ‘선 가정 후 사회보장’이라는 이름 아래 가정폭력 가해자를 경제적인 책임을 갖는다는 이유로 집으로 돌려보내는 사회에 살고 있다. 탈가정한 청소년을 문제화하고, 어떤 주거와 자립을 위한 구체적인 대책도 마련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가족에게 양육과 돌봄의 책임을 전가하는 사회를 의미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탈가정의 원인을 제대로 양육을 하지 못한 여성의 책임으로 돌리거나, 가난한 가정의 문제로 돌리는 낙인의 연쇄가 작동할 수밖에 없다. 결국, 탈가정한 청소년을 반복적으로 위험을 선택하고, 사회를 혼란케 하는 ‘문제가 있는’ 선택으로만 만드는 것은 가족에게 모든 삶의, 생존의 인프라를 전가하는 가족주의의 위기를 보이지 않게 하는 국가의 통치성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런 사회에서, 청소년만이 ‘집다운’ 집의 부재를 경험하는 게 아니라, ‘그 가정’ 안에서 아이를 적절하게 양육하지 못한 ‘엄마’인 자신을 자책하거나, 경제적으로 제대로 된 가장이 못되었다고 탓하는 젠더화된, 계급화된 고통의 회로 안에 ‘그 가정’이 놓일 가능성이 짙다. 이렇듯, 우리 모두를 ‘그 가정’ 안으로 몰아넣는 사회는 ‘시설화된 집’과 사회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런 지점에서 탈가정과 탈시설은 물리적인 장소의 이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부여하는 고정적인 딸, 아들의 지위, 양육자의 지위, 정상가족의 지위, 집 안과 밖의 공고한 지위를 바꾸어 내는 정치적인 움직임과 교차할 수밖에 없다.
고통의 회로가 아니라 함께 다르게 공존할 수 있는 연결은 가능할까?
어떻게 하면, ‘그 가정’ 너머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이’를 확장하고, 난잡한 연결과 시민적인 연대를 위한 사회의 토대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그것은 이 사회가 그토록 보호라는 이름으로 빼앗은 자유로움, 나다움의 의미를 다시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도 갖고 싶고 보호도 받고 싶었어요. 그런데 집에서는 사생활이 없었어요. 핸드폰도 뺏겼죠. 아빠의 폭력은 일상이 되었어요. 결국 살려고 도망쳤어요” (아깽)
자유와 보호가 둘 다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위험하다고 규정하는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안전하지 않은 모든 상황을 다 통제할 수 없듯이, 위험한 상황 모두를 통제할 수 없다. 어쩌면 가장 위험한 것은 자유로움, 나다움이 삭제된 보호가 가장 안전하다고 믿는 것일 것이다. 위험이 안전과 대비될수록, 위험과 보호가 분리될수록, 안전한 집과 안전하지 않은 바깥 세계는 더 분절적으로 사고 되어 왔고, 그 가정을 지키는 양육자의 권한, 친권의 권한만 강화되는 현실을 용납해 왔다. 그래서, 어쩌면 이 책에서 이야기하듯이 “청소년이 안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의논할 수 있는 관계와 기회의 부재는 청소년을 더 위험한 상황으로” (55쪽) 내몰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집 밖의 외부 세계에 대한 강한 공포나 두려움은 사회적으로 권한이나 결정권이 취약한 존재들에게 지속해서 무력하고, 순응적인 삶을 강제해 왔다. 우리는 집 밖의 외부 세계와 연결되는 환대의 자리 속에서 자신으로 살고,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집 안에서 억압을 경험할 때 숨고, 쉬고, 연결될 수 있는 외부 세계가 존재할 때, 집 안에서도 부당함에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자신을 지킬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주거권, 가족구성권, 탈가정, 탈시설은 스스로 정의할 힘을 만들어 가는 세계
이 책의 서문에서 “청소년 주거권으로 엮이게 된 우리는 모두의 주거권을 찾아가는 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 가정’을 떠난다고 집다운 집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집다운 집은 내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집을 떠나서도 살 수 있는 토대에서만 가능하다. 집다운 집은 사회적으로 가족 밖에서 사회적인 시민적인 연대와 돌봄이 가능할 때만 함께 꿈꾸고 만들 수 있는 장소이다. 집을 떠나서 이동 경로에서 청소년들은 시설로 보내지고, 그곳에서 삼촌으로, 이모로 가족적인 이름으로 불리기를 강요받지만, 그곳은 집일 수 없는 시설화된 사회를 확인하는 공간이다. 내가 부르고자 하는 나의 이름,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이름이 아니라, 여전히 사회가 강요하는 딸, 아들, 어린이, 청소년이어야 하고, 지정 성별을 강요받고, 성적지향을 추궁하는 곳일 때, 어느 곳도 집이 아닌 시설일 수밖에 없다. ‘그 가정’을 떠난 청소년들이 살기 위해서 이동 경로들은 ‘친구 집, 거리, 찜질방, 피씨방, 공중화장실, 사무실, 아르바이트하던 가게’(56쪽)이며, 보호자의 동의 없이 숙박업을 이용할 수 없기에 집 안에 있어도, 집을 나와도 모두가 ‘그 가정’을 대리하는 사회를 마주하게 된다. 임시적으로 머물고, 또 이동해야 하므로 캐리어 하나가 짐의 전부라는 이야기, 주소지를 만들 수 없어서 집 주소가 없는 홈리스 상태로 살아가는 미등록 상태라는 이야기들, 일하기 위해서는 부모님 동의서가 필요한 존재들, ‘자녀는 친권자가 지정한 장소에 거주해야 한다’라는 거소지정권으로 인해서 주거 계약을 할 수 없어서 머물 곳을 찾아야 하는 이동을 강행하지만, 이동의 이유는 너무 분명하다.
‘너무 살고 싶었기 때문’(석민)이라고.
임시적으로 귀속되고, 임시성을 통해서 아슬하게 이어지는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래도 청소년 주거권 이야기는 여전히 어렵게 다가오는 사회에 살고 있다. 잘사는 나라라고 그토록 선전하면서도, 영구임대주택이 3%밖에 안 되는 사회가 한국이며, 많은 이들이 집값에 허덕이면서 생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기존의 한정된 파이를 나누는 것으로 주거권을 상상할 때는, 청소년에게까지 갈 수 있는 주거는 가장 ‘나중에’로 유예될 수밖에 없다. 이토록 주거비와 살 수 있는 집의 부재를 이야기하면서도, 우리는 생존해 온 삶의 방식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나중에’로 유예되는 청소년이 “청소년에게도 집다운 집 내놔라!” 시설 아닌 곳에서 함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주거를 요구한다! 라고 저항하는 이런 목소리들은 지금까지 이 사회가 안정적인 가족이 없으면 모두가 사회적으로 고립, 단절, 불안정성과 연루되었던 사회와의 단절을 통해서 새로운 집과 소속될 자리들을 만들어 가는 움직임이다.
주거권, 가족구성권, 탈가정, 탈시설 움직임은 집다운 집의 의미를, 무엇이 가족인지를, 어떤 삶과 관계를 원하는지를 스스로 정의할 힘을 갖는 것이다. 어떤 삶과 주거와 관계를 원하는지 묻지 않고, 답이 정해져 있는 사회가 아니라, 물음과 질문을 통해서 확장되는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지금 탈가정, 탈시설을 원하고, 다르게 관계를 맺고, 다르게 의존할 권리를 요구하는 가족구성권 운동으로 연결되는 장들이다.
불안하지 않아서 ‘그 가정’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불안함을 안고도 기필코 찾아내고자 하는 그 집은 여러 만남과 돌봄을 통해서 가능하다. 청소년과 활동가의 만남, 청소년들 ‘사이’의 만남, 이 사회와 청소년의 만남, 비청소년과 청소년의 만남, 그 모두의 만남은 언제나 낯설고 새롭게 관계의 문법을 배우고 발명해야하는 책임을 갖는다. 그러한 책임을 함께 갖는 것은 간혹 아주 자주 실패할 수 있고, 종종 힘겨움을 마주하는 시간을 경유할 것이다. 그러나, 마주침의 낯섦을 피하는 자리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억압, 폭력, 단절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마주침의 시간과 연결의 노동과 실패의 의미를 의미화하고, 기록하고, 새기기 위해서 집 밖에서 함께 집을 찾고 서로를 돌보는 활동가들에게 깊은 연대의 감정을 표하고자 한다.